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3세 (문단 편집) === 재장례 === 원래 레스터대학교 고고학팀은 발굴을 시작하면서 어떤 유골이라도 발굴했다면 영국 고고학 발굴 법령에 의거하여 교회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골인 만큼 현재 운영하는 인근 그리스도교계 묘지로 재매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이 확실해지자 재매장이 아닌 재장례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나왔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생겼다. * 먼저 왕의 유골이었기에 먼 친척인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게 영국 왕실에서 리처드 3세의 재장례를 주관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다. 영국 왕실은 리처드 3세 재장례에 공식적으로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다. * 그 다음 언성을 높인 곳은 영국 국회였다. 레스터 지방 국회의원과 요크 지방 국회의원들이 서로의 역사적 관련성을 주장하며 논쟁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 논쟁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레스터시 시장이 내 시체를 밟고 리처드 3세의 유골을 요크로 가져가라고 한 것. * 세간에 알려진 [[레스터]] 시정부와 [[요크]] 시정부의 법적분쟁은 도시 대 도시의 소송이 아닌 '플랜태저넷 연합(Plantagenet Alliance)'이라고 불리는 리카디언계 협회에서 장지를 문제로 레스터 시와의 법적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 '플랜태저넷 연합'의 회원들은 이른바 [[플랜태저넷 왕조]]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의 모임으로 정통 리처드 3세파를 지칭했는데, 이 소송 때문에 장례식이 약 1년가량 연기되었다. 레스터시에선 소송비로 원래 발굴비의 약 6배 이상, 즉 25만 파운드까지 쓰게 되는 등 골머리를 앓았다. 플랜태저넷 연합이 법정에서 주장한 것은 자신들은 [[플랜태저넷 왕조]]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이므로 [[플랜태저넷 왕조]] 출신인 리처드 3세의 장례에 관한 일체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고, 따라서 리처드 3세의 유골을 요크 지방에 모시겠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 [[요크 왕조]] 이후로 영국 왕/여왕의 무덤 중 유일하게 유실된 무덤이었고, 리처드 3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재발견까지 드라마틱한 얘기로 구성되면서 관광 상품으로 팔아 먹기엔 최고의 먹잇감이 나타났으니, 역사적 근거를 떠나 [[요크]] 지방에서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법적 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법정은 이 사안에 대해 판결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말이 판결 없음이지 레스터대학에서 뭘 하든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사실상 레스터 시의 승리. 재판 과정은 물론 결과가 나온 뒤에도 플랜태저넷 연합은 망신을 당했으며[* 이 --똘아이 --협회에서 주장하는 건 흡사 경주 고분군 발굴과 관련해 경주 김씨 종친회가 아니라 경주 김씨 동호회가 나서서 북 치고 장구 친 꼴이라 하겠다.][* 한 수학자는 통계 확률상 현재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이 영국 내에서만 백만 명이 훌쩍 넘어가리라고 지적했다.] 돈은 양쪽 다 와장창 깨졌다. 리처드 3세를 레스터 지방에 재매장하기로 결정되자 장례식을 누가 주관하는가 문제가 생겼다. 영국 성공회는 당연히 성공회식 국왕 장례식을 주장했고, 영국 가톨릭은 [[성공회|잉글랜드 종교 개혁]]이 [[튜더 왕조]] [[헨리 8세]] 때의 일이므로 성공회 시작 이전 가톨릭 신자로 살았던 리처드 3세에게는 당연히 가톨릭식 장례식이 알맞다고 맞섰다. 결국 영국법 문제와 영국 왕실의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리고 판결에 의해서 재매장과 장례식에 관한 모든 권한은 레스터대학 고고학부에 돌아갔다. 고고학부는 고증에 따라 가톨릭식으로 성공회 레스터 대성당에 재안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50313114105969|기사]] 장례식 비용으로 든 40억 원가량의 대부분은 레스터시가 부담하기로 했는데, 레스터가 리처드 3세로 벌어들일 관광수익이 천문학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 영국 왕실이 주체가 된 장례식은 아니었지만 국왕의 예우를 갖춘 장례식으로 리처드 3세의 유해는 레스터 대성당에 안장하게 되었다.[[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50327012906897|#]] 리처드 3세가 새로 안치될 [[https://hanja.dict.naver.com/#/entry/ccko/87b9cd665a804e6abe6f2235223064de|재궁(梓宮)]]은 다름아닌 후손 마이클 입센이 제작했는데, 위에도 나와있듯 입센이 우연히 목수기에 가능했던 일. 입센은 오크나무로 재궁을 짜고 요크 가문의 장미 문양을 새겨넣었다. 장례 행사는 발굴과 연구를 주도한 레스터대학에서 시작했다. 재궁은 국왕기를 두르고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깃발과 현직 군인들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리처드 3세가 전사한 보스워스 전투지로 옮겼고, 이후 예포 발포 및 그의 넋을 달래는 가톨릭 의례를 진행했다. 그후 장례식을 거행할 레스터 대성당으로 향하였다. 일반 시민들이 경의를 표할 수 있도록 리처드 3세의 관을 [[https://ko.dict.naver.com/#/entry/koko/5696561989a24101b7329c86e4870303|사마(駟馬)]]가 끄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5459&cid=41826&categoryId=41826|유궁(柳宮)]]에 실어 운구하면서 여러 영빈과 호위병들이 따르는 가운데 레스터 시내를 행진했다. 재궁이 지나갈 때마다 시민들은 리처드 3세 국왕기를 흔들고 요크 가문의 상징인 흰 장미를 던지며 리처드 3세를 기렸다. 레스터 지역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형형색색 깃발을 흔들며 왕의 귀환을 반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TGCCQMXB1-E&ab_channel=UniversityofLeicesterNewsCentre|레스터 시가 행진 장면]] || [[파일:bosworth.jpg|width=100%]] || [[파일:Citymarch1.jpg|width=100%]] || || [[파일:cathedral1.jpg|width=100%]] || [[파일:citymarch2.jpg|width=100%]] ||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보스워스 전투지 행사, 시가 행진,[br]시가 행진 중인 리처드 3세의 관, 장례식 이전 레스터 대성당에 공개된 리처드 3세의 관과 장례 왕관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며느리이자 에드워드 왕자의 아내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 리스존스]]와 여왕의 사촌동생 [[리처드 알렉산더 월터 조지|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왕가를 대신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리처드 3세의 후손인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영국 계관시인 캐롤 앤 더피의 시 '리처드'를 낭독했고[[https://www.youtube.com/watch?v=38nodTfpro4|#]][* 공교롭게도 당시 컴버배치는 할로우 크라운이라는 드라마에 리차드 3세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유전자 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한 후손 마이클 입센, 또 다른 후손 웬디 덜디그도 참가했다. 발굴을 처음부터 주도했던 필리파 제인 랭리, 레스터대학 고고학장 리처드 버클리가 상주 역할을 했고, 천주교 웨스트민스터 대교구[*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이 새로 설립한 교구로, 런던 일대를 관장하며 영국 가톨릭의 으뜸 교구이다.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교구에 준하는 지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의 교구장 추기경과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 본디 가톨릭이었으나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로 분리되었다. 설립 당시부터 영국 교회의 으뜸 교구 역할을 수행하며, 왕실과 관련된 종교의례의 책임자이기도 하다.]의 입회 아래 레스터 대성당 주임사제[* Dean은 주교가 아닌 주임사제를 의미한다. 레스터 대성당은 성공회 성당이기에, 주임사제는 성공회 사제이다.]의 집전으로 재장례를 하였다. || [[파일:MichealWendy.jpg|width=100%]] || || 장례식전 행사에 요크 가문의 흰 장미를 헌화하는 리처드 3세 누이의 후손 마이클 입센(왼쪽)와 웬디 덜디그 || 이렇게 1485년 전사하고 2012년 발굴되어 법적 분쟁을 거치기까지 500년을 넘는 한 많은 시간을 보낸 리처드 3세는 2015년 3월 26일, 영면에 들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이 지역의 축구팀인 [[레스터 시티 FC]]는 왕의 은총을 받았는지 [[레스터 시티 FC/2015-16 시즌|축구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보통 [[레스터 시티 FC]]의 기적을 이야기 할 때면 역사에 남을 우승을 차지한 [[레스터 시티 FC/2015-16 시즌|2015-16 시즌]]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리처드 3세의 재장례가 끝난 뒤의 2014-15 시즌 후반부도 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리처드 3세가 영면에 든 2015년 3월 26일 당시 승격팀 레스터는 리그에서 고작 4승 7무 18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리그 최하위에 처져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리처드 3세의 장례식 이후 남은 9경기에서 '''7승 1무 1패'''라는 말도안되는 성적을 올리며 14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승격팀 가운데 유일하게 잔류에 성공했다. 심지어 저 1패도 당시 리그 우승팀이었던 [[첼시 FC]]를 상대로 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승을 차지한 2015-16 시즌 뿐만이 아니라, 그 발판을 마련한 2014-15 시즌의 기적적인 잔류도 리처드 3세의 은총 이야기를 들을 법 한 것이다. 때마침 레스터 시티의 메인 스폰서가 '''[[킹 파워]]'''(King Power)인 점도 여러모로 언급되었는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킹 파워 그룹이 태국 기업이므로 여기서의 킹은 당연히 [[태국 국왕]]을 의미하나, 이런 점을 떼놓고 보면 그저 '왕의 힘'이라는 단순한 문장으로도 해석되므로 '리처드 3세의 힘'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o6knplA0Vr1uckof9o1_1280.jpg]] [[레스터 시티 FC|이 팀]]이 우승을 거머쥐자 가디언에서는 이렇게 1면을 내보냈다. 이렇듯 리처드 3세의 유골 발견 과정부터 정말 행운에 행운이 겹쳤고, 600년 전에 죽은 왕의 원한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후손들에 의해 해소되고 그 후손들의 노력으로 무사히 장례식을 치르게 된 것도 충분히 감동적인 스토리인데, 게다가 그 왕의 영혼이 영면한 도시를 축복했다는 판타지 동화 같은 이야기가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전후로 실제처럼 나타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 [[파일:KnightingPhilippaLangley.jpg|width=100%]] || [[파일:KnightingJohnAshdownHill.jpg|width=100%]] || |||| [[파일:PhilippaLangleyJohnAshdownHill.jpg]] ||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번 발굴로 업적으로 기사단에 임명되는 필리파, 모계 족보를 구성해 후손을 찾아낸 리카디언 향토사학자 존 애쉬다운힐 박사, 기사 서임 후 둘이 찍은 사진 || [[https://www.youtube.com/watch?v=6URxbMmEMcw|유골발견 및 유전자 분석에 관한 첫 다큐멘터리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4eDtsnQnFfQ|유전자 분석 도중 고증한 척추측만증 환자와 전투 신경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91R-LkW2x3s&t=2s&ab_channel=UniversityofLeicester|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과학적 결론]] [[https://www.youtube.com/watch?v=wR1IjOVWI7Y|#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유골 발굴지 보고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yYY-usw9K_U&t=302s|#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DNA검사와 결론 영상]][* 이번에 새로 추가된 유골 재발굴에 관한 모든 내용은 양 다큐멘터리와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학술대회를 요약한 내용이다. 이들 모두 영어로 나오니 시청에 유념할 것.] [[https://www.nature.com/articles/ncomms6631#Sec2|#레스터 대학에서 네이처(Nature) 지에 공개한 리처드 3세 유전자에 관한 논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